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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프란시스코 고야 생애 - 궁정화가에서 근대미술의 선구자로

by goodart 2025.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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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고야 생애
프란시스코 고야 생애 - 궁정화가에서 근대미술의 선구자로

 

18세기 스페인 궁정의 화려한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가 어떻게 전쟁의 참상과 인간 내면의 어둠을 그리는 혁명적 예술가로 변모했을까요?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는 한 시대를 통과하며 완전히 다른 화가가 된 특별한 인물입니다. 오늘은 근대 미술의 문을 연 고야의 생애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고야의 초기 생애 - 시골 소년에서 화가의 꿈까지

아라곤의 가난한 소년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는 1746년 3월 30일 스페인 북동부 아라곤 지방의 작은 마을 푸엔데토도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도금공이었고, 어머니는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죠.

어린 시절 고야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는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교육의 기회를 주려 애썼습니다. 고야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특히 마을 교회 벽화에 매료되었죠.

사라고사에서의 도제 생활

14세가 된 고야는 가까운 도시 사라고사로 보내져 화가 호세 루산 이 마르티네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4년간 스승 밑에서 그림의 기초를 배웠지만, 당시 고야는 평범한 수준의 학생이었습니다.

고야는 빠른 성장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기질이 거칠고 반항적이어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죠. 하지만 이런 격정적 성격은 훗날 그의 예술에 강렬한 에너지를 불어넣는 원동력이 됩니다.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의 초상화



마드리드 도전과 좌절

왕립미술아카데미 낙방

1763년, 17세의 고야는 꿈을 안고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로 향했습니다. 목표는 왕립 산페르난도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고야는 입학 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당시 아카데미는 신고전주의 양식을 중시했는데, 고야의 거친 화풍은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지 않았던 것이죠.

재도전과 재실패

실망한 고야는 사라고사로 돌아갔다가 1766년 다시 마드리드로 올라왔습니다. 이번에도 아카데미 입학 시험에 도전했지만 또다시 낙방했습니다.

두 번의 실패는 고야에게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죠. 당시 마드리드에서 활동하던 궁정화가들의 작품을 보며 독학으로 실력을 키워나갔습니다.


이탈리아 유학 -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

로마로의 여행

1770년, 24세의 고야는 이탈리아로 떠났습니다. 정확한 여행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투우사 패거리와 함께 떠났다는 설도 있고, 귀족의 후원을 받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로마에서 고야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의 거장들을 직접 보며 눈을 떴습니다.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카라바조의 작품들은 그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죠.

파르마 아카데미 입선

이탈리아에서 고야는 파르마 왕립 아카데미가 주최한 그림 공모전에 출품했습니다. 주제는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바라보다"였죠.

고야는 비록 1등을 하지는 못했지만 가작으로 입선했습니다. 이는 그의 첫 공식적인 수상이었고, 화가로서의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귀국과 결혼 - 인생의 전환점

사라고사 대성당 프레스코화 의뢰

1771년 스페인으로 돌아온 고야는 고향 근처 사라고사의 필라르 성당에서 천장 프레스코화 작업을 의뢰받았습니다. 이는 고야의 첫 중요한 작품 의뢰였죠.

〈성모 마리아의 찬양〉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바로크 양식으로 그려졌습니다. 화려한 색채와 역동적인 구도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고야의 기본기가 탄탄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운명을 바꾼 결혼

1773년 7월 25일, 27세의 고야는 호세파 바예우와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은 고야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왜냐하면 호세파의 오빠 프란시스코 바예우가 당대 최고의 궁정화가였기 때문이죠. 바예우는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고야를 마드리드 화단에 소개해주었습니다.

이 결혼으로 고야는 마침내 궁정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왕실 태피스트리 화가로 출발

산타바르바라 왕립 공장

1775년, 29세의 고야는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의 디자이너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장인 프란시스코 바예우의 추천 덕분이었죠.

태피스트리는 왕궁과 귀족 저택을 장식하는 직물 벽걸이로, 당시 스페인 왕실이 크게 중시하던 예술품이었습니다. 고야의 임무는 태피스트리로 짤 밑그림(카르톤)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밝고 경쾌한 초기 작품들

1775년부터 1792년까지 약 17년간 고야는 63점의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제작했습니다. 초기 작품들은 스페인 서민들의 일상과 축제, 놀이를 그린 밝고 경쾌한 분위기였죠.

대표작으로는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 있습니다:

  • 〈양산〉(1777) - 귀족 여인과 하인의 목가적 장면
  • 〈마드리드의 장터〉(1778) - 활기찬 서민들의 모습
  • 〈눈먼 기타 연주자〉(1778) - 민중의 삶과 음악
  • 〈연 날리기〉(1777-1778) - 어린이들의 순수한 놀이

이 시기 고야의 그림은 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아 밝고 장식적이었습니다. 아직 훗날의 어둡고 비판적인 화풍은 보이지 않았죠.


 궁정 화가로의 상승

화가 조합 가입과 인정

1780년 고야는 왕립 산페르난도 미술아카데미 회원으로 정식 선출되었습니다. 한때 두 번이나 떨어졌던 그 아카데미에 정회원으로 들어간 것이죠.

입회 작품으로 제출한 **〈골고다 언덕의 그리스도〉**는 종교화였지만, 고야 특유의 드라마틱한 구도와 빛의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궁정 초상화의 시작

1780년대 고야는 점차 왕실과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카를로스 3세의 후계자인 아스투리아스 공과 그의 가족들을 그리며 왕실과 인연을 맺었죠.

고야의 초상화는 단순히 외형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성격과 내면을 포착하는 데 뛰어났습니다. 이는 훗날 궁정화가가 되는 중요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고야 초기 생애가 미술사에 남긴 의미

고야의 초기 40년은 한 평범한 시골 소년이 끈질긴 노력과 좋은 인연으로 궁정 화가의 자리까지 오르는 성공 스토리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 고야는 아직 '근대 미술의 선구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로코코와 신고전주의 양식을 충실히 따랐고, 왕실과 귀족의 취향에 맞춰 밝고 우아한 그림을 그렸죠. 진짜 고야의 혁명은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다음 편에서는 고야가 어떻게 궁정 수석화가의 자리에 올랐고, 동시에 그의 예술이 어떻게 변화하기 시작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편 예고:

프란시스코 고야 2회 - 궁정화가의 영광과 청각 상실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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